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.18 민주화운동/학살 (문단 편집) === [[주남마을 버스 총격 사건|주남마을 버스 학살]] === [youtube(59RMwtogfQ4)] [[https://twitter.com/518inManinbo/status/898574766960816128|김춘례]]는 23일에 할아버지 제사를 가려고 기숙사 동료인 [[https://twitter.com/518inManinbo/status/898569828394336258|고영자]]와 함께 시민군들한테 찾아갔다. 사정을 들은 [[https://twitter.com/518inManinbo/status/898578537296285696|백대환]]은 데려다 주기로 했고 17명과 함께 도청에서 출발해서 화순으로 향했다.[* 그 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, 265쪽.] 그 때 군인 한 명이 도로변에 나와 차를 멈춰라 그랬다. [[기아 AM버스#s-2.4.1|아시아 AM808]] 버스는 그걸 무시하고 세게 달렸다. 그렇게 무시하고 달리니 산 쪽에서 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. 차 안에 있던 젊은이 2~3명은 산에다 총을 쐈다. 남학생들은 머리에다가 총을 들고 항복했고, 여학생들은 손을 흔들고 살려달라고 했다. 그래도 총알이 계속 날아왔고 사람들은 엎드렸다.[* 144회 국회 5.18 청문회 회의록, 제26호, 1989년 1월 27일.] 총알은 계속 날아왔고 15명이 사망했다. 3명이 살아남았다. 홍금숙과 부상자 2명은 주남마을 여단 상황실로 이송됐다. 간호봉사원들은 전남대병원으로 후송할 것을 요구했으나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거부했다. 11공수여단 작전보좌관인 김 소령은 부상자들을 데려온 것을 책망까지 했다. '''군인들은 부상자 2명([[https://twitter.com/518inManinbo/status/889672865729007616|채수길]], [[https://twitter.com/518inManinbo/status/889516898919919616|양민석]])을 인근 야산으로 데려간 뒤 쏴죽였다.''' 당시 현장 부근에는 11공수여단 간부들이 있었는데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. 정 중사는 사실을 알고도 제재 조치를 하지 않았다.[* 12, 5.17, 5.18 국방부 보고서 98쪽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